샤프한 외모, 지적인 안경, 정갈한 슈트를 착용한 이브 생 로랑의 사진을 보면 그의 패션 세계관도 고루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하지만 반전의 역사를 살펴볼 수 있다. 일반 소비자들도 브랜드 로고에 대해서는 익숙할 것이다. 향수, 립스틱, 쿠션등 화장품으로 브랜드를 만났을 테니까 말이다. 하지만 우리도 모르는 사이 이브 생 로랑의 패션 세계관은 후대를 점령했고 그 혁명에 스며들어 동참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이브 생 로랑의 발자취
이브 생 로랑은 1936년 북부 아프리카의 알제리에서 태어난다. 그는 부르조아 출신의 패셔너블한 어머니, 두 여동생, 할머니 등 많은 여성들에게 둘러싸여 지냈다. 어머니가 보던 패션 잡지들을 보며 두 여동생들의 인형 옷을 만들어 입히기도 했다. 가정에서는 행복한 어린 시절을 보냈지만, 약하고 소심한 그는 학교생활에서 동급생들의 끊임없는 폭력과 괴롭힘을 당한다. 14살이 되던 해, 이브 생 로랑은 프랑스의 저명한 예술가 크리스티앙 베라르의 무대 디자인과 무대 의상에 매료되어 창작의 꿈을 키우게 된다. 17세가 되던 1953년 국제양모사무국 디자인 콘테스트에서 '드레스' 부분 3등, 54년에는 1등을 수상하며 뛰어난 스케치 실력을 인정받는다. <보그> 편집장의 권유로 '파리의상조합' 학교에 진학하지만 교육과정에 흥미를 잃게 되어 몇 달 만에 그만두고 1955년 크리스찬 디오르의 조수로 근무하게 된다. 스승에게 실력을 인정받던 그는 1957년 스승의 갑작스러운 죽음으로 21살에 후계자가 되어 디오르 하우스의 아트 디렉터가 된다. 그는 스트릿 패션에서 영감을 얻어 '비트룩'을 선보이지만 보수적인 디올의 소비자들에게 외면을 받게 된다. 경영진은 그를 해고하고 군대에 입대시키다. 전쟁터에 나간 이브 생 로랑은 고향인 알제리가 독립을 위해 치열히 싸우는 것을 보고 충격을 받아 정신과 치료를 받으며 제대하게 된다. 1961년 동성 연인 피에르 베르게의 도움으로 '이브 생 로랑 쿠튀르 하우스'를 설립하고, 1962년 대망의 첫 컬렉션을 개최한다. 선원들의 재킷을 여성복에 접목한 피 재킷(pea jacket)과 바지, 튜닉 등을 소개하며 큰 반향을 일으켰고 호평을 받는다. 1963년에는 선원 재킷, 농부 셔츠, 어부 방수복 등에 트위드, 새틴과 같은 소재를 입히고 긴 부츠를 착용하여 여성들에게 활동성과 자유로움을 선사하는 보이시 룩(boysh look)을 발표한다. 1966년 '르 스모킹' 1967년 '스트라이프 팬츠 슈트' 1968년 '시스루 드레스' 매번 새로운 행보를 선보였다. 1966년 생 로랑은 젊고 덜 부유한 여성들을 위한 기성복 라인 '생 로랑 리브 고슈'를 시작하며 출퇴근하는 자신감에 찬 현대 여성상을 어필한다. 또 다른 테마는 다문화주의라고 할 수 있다. 알제리 출신인 그는 이국적인 풍경, 색채감, 문화, 전통의상을 독창적이고 천부적인 감각으로 다채로운 컬렉션에 녹여냈다. 아프리칸 컬렉션, 러시안 룩, 스페인, 고대 중국, 모로코, 터키, 몽골 등, 전통의상과 문화를 옷을 통해 소개했고 패션쇼에 동양인 모델과 흑인 모델을 기용한 첫 번째 쿠튀르 디자이너였다. 현대 예술 작품의 열렬한 수집가였던 그는 다른 예술가들과 활발한 교류를 통해 영감을 얻고 협업을 통해 새로운 컬렉션을 완성하기도 한다. 1965년 신조형주의 몬드리안의 회화를 오마주한 몬드리안 드레스, 1966년 앤디 워홀의 영향을 받은 강렬한 색상의 팝아트 의상, 1979년에는 피카소, 1988년에는 반 고흐의 해바라기까지 수많은 작품들을 모티브로 한다. 2002년 파리의 퐁피두 센터에서 '이브 생 로랑' 40주년을 기념하는 패션쇼를 마지막으로 '이브 생 로랑 쿠튀르 하우스'는 PPR그룹에 인수된다. 이브 생 로랑은 2008년 6월 1일 지병인 뇌종양으로 사망한다. 사후 비즈니스 파트너이자 전 연인이었던 피에르 베르게는 평생에 걸쳐 수집한 미술품 컬렉션 700점을 경매로 처분하여 수익금의 반은 '피에르 베르게-이브 생 로랑 재단' 설립에 사용했고, 나머지 반은 에이즈 연구에 기부되었다.
패션의 혁명
"나는 2류 아트를 했지만 결국에는 2류가 아니었다." 이브 생 로랑은 상류층만의 디자인을 거부하고 스트리트 패션을 도입한다. 시대의 흐름을 읽고 새로운 패션을 제안하는 혁명적인 그의 도전은 혹평과 호평을 가르며 자신만의 창조의 세계를 열어 나갔다. 이브 생 로랑이 남긴 패션의 혁명이라 불리는 작품들을 살펴보자.
-피 재킷: 그의 첫 컬렉션에서 선보인 것으로 선원들이 즐겨 입는 재킷에서 영감을 얻어 여성복으로 제안한다. 미국 잡지 <라이프>는 샤넬 이후의 최고의 슈트 메이커라며 찬사를 보낸다.
-르 스모킹: 당시 여성들은 모임에서 화려한 드레스를 착용했는데, 그는 여성을 위한 턱시도를 새로운 이브닝웨어로 제안한다. 몸에 딱 맞는 긴 재킷, 일자로 떨어지는 바지, 주름장신인 자보가 달린 오간디 소재의 셔츠, 실크 새틴의 배를 감싼 벨트로 구성된 르 스모킹은 새로운 여성상을 위한 혁명적인 의상으로 이브 생 로랑도 생애 가장 중요한 작품이라고 평했다.
-시스루 드레스: 비치는 소재로 여성의 실루엣을 은근하게 노출시키는 드레스이다. 오늘날 시스루 룩의 시초가 되는 매우 파격적인 의상이었다.
-에스닉 룩: 비서구권 문화에 눈을 뜬 그는 이국적인 민속의상에서 영감을 얻어 그의 혁신적인 디자인에 결합시킨다. 러시아, 체코슬로바키아, 몽골, 터키, 고대 중국 등. 다양한 나라의 전통과 문화를 에스닉 룩에 녹여낸다. 그는 패션쇼에 흑인과 동양인을 모델로 기용한 첫 번째 디자이너였다.
-몬드리안 드레스: 몬드리안의 그림에서 영감을 얻은 작품. 검정의 수직선과 수평선, 빨간색, 파란색, 노란색의 구성을 그대로 옮겨 놓은 듯한 일자형 울 저지 시프트 드레스이다. 패션 잡지 역사상 가장 많이 촬영된 옷으로 기록된다.
그 외에도 피카소의 꿈, 고흐의 해바라기, 앤디 워홀, 폴 고갱, 장 콕토, 앙리 마티스 등. 수많은 예술가에게서 영감을 얻은 작품들을 내놓는다.
영향력
현대를 사는 우리에게 익숙한 아이템들이 이브 생 로랑과 연관이 있음을 알게 된다. 그는 전통적인 패션을 현대적이고 진보적인 디자인으로 발전 시켜 오늘날까지 패션계에 영향력을 미치고 있다. 여성의 자신감과 독립성을 강조하는 디자인을 지향하며 성별 고정관념을 깨뜨렸다는 점에서도 의의가 있다. 이브 생 로랑의 파트너이자 동성 연인인 피에르 베르제는 이렇게 말했다.
개인적으로 여성 패션에 최초로 바지를 도입하여 여성에게 자유를 선물한 그에게 감사를 표한다. 올 겨울엔 피 재킷을 사입을 예정이다. 물론 명품이 아닌 일반 브랜드겠지만 그의 영향력을 생각하며 멋지게 입어보려 한다.